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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색 지네 거대한 그림자가 가로지른다. 기다랗고 검은 무언가. 거대한 광산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선로망 위를 빠르게 가로질러 나아간다. 기다랗게 꿈틀거리는 그림자. 수많은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여가는 그것은, 거대하게 뚫려있는 광산의 구멍 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어둡고, 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자욱한 연기가 가득 끼어있는 곳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선로망. 무한히 펼쳐져 있는 어둠. 그 속으로, 그것은, 그 거대한 지네는, 끝없는 광산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을 향해 파고들었다. 광산의 끝자락. 가장 깊은 곳. 그곳은 오히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광산의 벽 곳곳에 박혀있는 수많은 용주들이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그곳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수많..
세라프 그날 새벽은 유난히 해가 늦게 떴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세상이 밝게 비춰지고 있을 시간인데도 주변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주변은 사람 이야기 소리 하나 없고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뿐만이 전부였다. 인기척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하쿠레이 신사도 마찬가지. 지난밤 늦게까지 연회를 즐긴 인요들은 다같이 신사 앞마당에 드러누워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널부러진 술병, 먹다 남긴 음식, 전부 불타고 남은 모닥불의 재. 또각.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그 돌계단과 부딪히는 발걸음 소리는 틀림없이 신사를 향한 계단을 오르는 소리였다. 귀가 밝은 걸까. 아니면 무녀로서의 감일까. 모두가 잠든 난장판 속에서 레이무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으응…” 밤 사이 내내 이어져온 잠기운..
모두에게 보이는 실종자 늦은 저녁 시간. 나는 바닥에 옆으로 누워 과자를 입에 집어넣으며 신문을 넘겼다. 신문은 운잔도 같이 볼 수 있도록 살짝 비스듬히 놓고서는 또 한 페이지를 옆으로 넘겼다. 꽤나 한가로웠다. 오늘은 마당 청소도 끝냈고, 불상 정리도 다 했고, 나머지 잡일들은 대충 쿄코한테 떠넘기면 된다. 그렇기에 하는 거라곤 이렇게 재미없는 신문이나 보며 하품하는 것뿐이었다.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만 하고, 슬슬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까지 저려오던 참이었다. “이보게, 잠깐 심부름 하나 하지 않겠나?” “으엣?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입에 물고 있던 과자마저도 떨어뜨리며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오며 말한 탓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눈앞엔 우리 명련사의 너구리 요괴, 마미조가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꽃 틈새 선계에는 바람이 불면 꽃이 흩날린다. 이곳은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꽃이 피기에 떨어지는 꽃잎들은 바람을 타고 어디까지나 널리 퍼져나간다. 창문을 통해 나에게로 불어오는 이 산들바람 역시 꽃향기를 머금은 채 부드럽게 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던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노을빛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한 번도 너를 만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의 일상이기에 저 노을빛이 하루를 끝내기 전에 나는 너를 만나야 했다. 나는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약간의 틈새만 남을 정도로 닫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선반에는 갖가지 술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서서 붕대로 감겨 있는 오른팔을 뻗어 술병들을 하나씩 확..
마이와 사토노의 수색 작전 “심심하다 사토노.” “나도 마이.” 바닥에 널브러지듯 드러누워 있는 마이가 입에 물고 있는 대나무 줄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그 옆에 비슷한 자세로 누워있는 사토노도 손에 쥔 양하의 잎사귀를 하나하나 떼어가며 말했다. “스승님은 또 어딜 가신 걸까. 우리 둘만 남겨놓고.” “글쎄. 이번에도 말 안 해주시겠지.” 최근 마이와 사토노의 지루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사계이변 이후 오키나는 비신 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외출이 잦아졌으며 단 한번도 어디로 가는지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그나마 할 일이라도 많았으면 지루할 틈은 없었겠지만, 이변 이후 오키나는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남아있기만 한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할 일도 없이 드러..
날개 없는 나비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호수의 물결과 푸른 잎사귀들을 밝게 비췄다. 봉오리였던 꽃들은 피어나고 곤충이 완전히 성충으로 자라나는 계절에 자연의 생명력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졌다. 보통의 인요들에겐 다소 무더운 날씨일 수도 있지만, 자연의 상징인 요정들이 활개 치고 다니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라~바~” “치~르노~” 한여름의 열기에 신이 난 두 요정은 서로를 마주하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었다. 사계이변이 끝나고 요정들의 폭주도 멈추었지만 아직 그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날씨와 함께 여전히 들뜬 두 요정은 만나기만 한 것만으로도 이미 놀 생각이 한가득이었다. “오늘은 뭘 하고 놀까? 숨바꼭질? 술래잡기? 개구리 얼리기?” 치르노는 신이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들을 줄줄이 늘어놓았..
사신이 하는 일 삼도천의 강. 그 앞에 흐르는 물살을 넋 놓고 바라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강은 끝도 없이 넓고 깊었으며 물 흐르는 소리 하나 없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삼도천의 티 없이 맑은 물보다 더 투명한 손. 그 손은 너무나 투명해서 그 아래의 땅은 물론, 바닥에 널려 있는 작은 돌멩이들까지 비쳐 보일 정도였다. 소년은 한참을 끝없이 펼쳐진 강물과 자신의 투명한 몸을 번갈아 봤다. 몇 시간이고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려내기라도 한 걸까. 소년은 땅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 그 작은 손에 돌을 집어 들었다. 오노즈카 코마치는 커다란 낫을 등에 메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주변 경치를 감상했을 ..
좀비가 먹어줍니다! “어이~ 레이무.” 평소와 같이 평화로운 하쿠레이 신사. 오늘도 평소와 같이 빗자루를 탄 마리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레이무에게로 다가갔다. “신문 봤냐?” “응, 봤어.” 마리사는 신사 툇마루에 앉아있는 레이무의 앞에 신문을 활짝 펴고는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좀비 주인을 찾습니다! 환상향에 주인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좀비 출현! 좀비는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니 발견할 경우 즉시 도망칠 것. 이렇게 적혀 있는데?” “그렇더라고.” 레이무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하면서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홀짝거렸다. 마리사는 그런 레이무의 반응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신문을 확 접어 내렸다. “그게 다냐?”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는데?” “뭐긴 뭐야! 그 좀비 바로 여기 있잖아! 여기 신사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