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형이다.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수많은 인형들 중 하나. 나를 품고 있는 이 거대한 강철 상자 안에는 인형들이 아주 많다. 인형 상자치고는 제법 화려하다.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무늬가 빼곡하게 장식하고, 그 무늬들은 저마다 다른 빛을 내뿜으며 계속해서 반짝인다. 우리는 이 상자 안에 갇혀 춤을 추기만을 기다리는 인형들이다.
멀리서 인형사가 다가온다. 딱딱한 인형사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맞부딪히는 소리가 상자 안에 울려 퍼진다. 인형사는 우리들 앞에 서서 삐걱거리는 몸을 바로잡고 차렷 자세로 선다. 인형사가 인형들을 향해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든다. 인형사의 팔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모든 인형들이 일제히 무릎 꿇는다. 그리고 인형들은 자신의 고개를 낮춰 그 인형사 앞에 머리를 박는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에 하나같이 기계적인 동작만을 보이는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아니, 숨을 쉰다는 표현 자체가 이상한가. 나는 이미 죽었다. 한때 인간이었지만 죽어서 영혼만이 남은 존재.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런 존재들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인형사가 되고 싶었다. 인형을 움직일 때만큼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그 감각은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전신을 짜릿한 자극에 휩싸이게 하며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줬다. 그 감각만이 내가 사는 이유였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내 인생은 그 감각을 찾아다니는 것만이 전부였다. 어떤 인형이든, 어떤 인형극이든, 손에 다룰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뭐, 그 과정에서 죄를 지은 게 워낙 많았으니 죽고 나선 이렇게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살아있을 때의 나는 동료와 함께 행동했었다. 내 인형극을 도와주던 동료들. 그 녀석들도 곱게 살진 않았으니 분명 지옥에 갔을 텐데 여기선 찾아볼 수가 없다. 지옥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니 아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긴, 자신을 죽인 사람을 죽어서도 다시 만나라니 그건 가혹하지. 염마라는 녀석도 나름 자비란 게 있나 보다.
죽은 후에는 나도 그 염마라는 녀석에게 재판을 받았다. 결과는 당연히 지옥. 그 판결은 나에게 내려졌고 재판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떴을 때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나무와 풀이 가득한 곳에 서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하며 주변을 채 둘러보기도 전에 그곳의 누군가가 내 머리를 잡아끌었다. 나는 몸부림쳤고 나를 잡아챈 그 팔을 떼어내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를 끌어당긴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동물. 의심할 것도 없는 분명한 동물의 모습이었다. 놀란 나의 뒤통수를 향해 동물은 주먹을 휘둘렀고 나는 기절한 채로 그 동물에게 어디론가 끌려갔다.
끌려간 그곳에는 훨씬 더 많은 동물들이 있었다. 흔히 널려있는 동물들부터 이야기로만 들어 왔던 전설 속의 동물들까지. 그곳엔 세상 모든 동물들이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동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들이 가득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는 온몸이 피와 멍으로 뒤덮여 있는 인간들이 동물들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생전에 죄를 짓고 이곳으로 온 인간들이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물들은 나를 그 인간들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피와 멍으로 물든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주먹과 무기를 휘둘렀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며 나의 몸을 상처 입혔다. 나는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몸을 웅크리고 계속 맞아야만 했다.
그곳에서 내가 처음 경험한 것은 폭력과 구타, 지배와 복종, 절대적인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 나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고 그 강자들 앞에 무릎 꿇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인형이 되었다.
인형을 다루는 건 인간만의 특기라고 생각했는데, 동물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인형사가 있었다. 귀걸조의 조장이라 불리는 머리에 두 개의 큰 뿔을 가진 동물은 인형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천재적인 솜씨를 내보였다. 그녀는 항상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실처럼 몸을 옭아맸고 우리는 그 실에 매달린 채 그녀의 명령대로 춤추는 인형이었다.
경아조의 조장이라 불리는 커다란 날개와 꼬리를 가진 동물은 그에 질세라 있는 힘껏 인간들의 머리를 밟아댔다. 그 압도적인 다리 힘에 밟히면 고개를 들 생각을 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입이 아닌 다리로 명령했다.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날아오는 발길질은 우리 모두를 말 잘 듣는 인형으로 만들었다. 다소 난폭하긴 했지만 그녀 역시 뛰어난 인형사였다.
죽은 영혼이라곤 해도 살아있을 때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육체가 없어도 피로가 느껴지고 배고픔을 느낀다. 다만 먹지 않아도 되고 쉬지 않아도 되니 계속 지내다 보면 익숙해진다. 게다가 육체가 없으니 아무리 심하게 얻어맞아도 죽지 못하고 금방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말이 좋아 영혼이지, 노예로 쓰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재료가 없었다. 동물은 우리 인간들을 그렇게 사용했다. 동물과 인간의 사이에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했고,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인간들은 동물의 지배를 받는 노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이 마냥 순종적인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자들은 동물들의 억압에 저항하며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곳의 몇몇 사람들은 이미 동물의 눈을 피해 서로 힘을 합치고 있었고 동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들만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머리를 밟히면서도 생전의 꿈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동물이 아닌 인간을 위해 일하기를 꿈꿨다. 동물이 없는 이 땅에서 마음껏 뛰어다니기를 꿈꿨다. 조각가, 화가, 작가. 그들에겐 다양한 꿈이 있었다. 나의 꿈? 당연히 인형사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싸우기를 요청했다. 처음엔 거절당했다. 여자인 데다 몸집도 작고 왜소했으니 방해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함께 싸우기를 요청했고, 마지 못한 그들은 결국 나를 동료로 받아주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금방 내 실력을 인정했다. 힘이 센 건 아니었지만 살아있을 때 도적질을 제법 해봤으니 몸을 쓰고 싸우는 일에는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났으니까.
나는 그들과 협력하여 동물에게 맞서 싸웠다. 힘으로만 밀어붙이기엔 한계가 있는 동물과의 싸움에 내가 짠 전략은 더 잦은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인간들이 힘과 지혜를 모으면 그 강한 동물들과 싸워 이기기도 하였다.
우린 동물의 명령대로 움직였지만 마음만은 굴복하지 않았다. 한낱 짐승 따위가 우리의 머리는 밟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의지까지 짓밟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빨과 발톱을 뜯고 부리를 잡아 뽑았다. 눈을 찌르고 덫을 만들었으며 목을 잡아 비틀어 우리가 당한 굴욕을 되돌려 주었다. 함정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다 같이 짓밟는 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럴 때마다 다른 동물들에게 끌려가 몇 날 며칠을 얻어맞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갈수록 심해진 인간들의 저항에 동물은 모든 인간들을 한곳에 가둬놓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한곳에 모인 인간들의 기도는 이 세계에 신을 불러들였다. 그 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순식간에 동물에게 이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동물이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신이 만든 조형물들은 감히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고, 그 힘에 대항할 방법이 없는 동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나타나고 얼마 후, 세계를 지배하던 동물들은 이를 갈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물러갔다. 그렇게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동물과의 싸움은 겨우 며칠 만에 인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껴안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감격에 젖어 울기도 하고 도망가는 동물들을 쫓아가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고, 누군가는 승리의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 우리는 모두 해방의 순간을 만끽하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꿈꾸었다. 모두에게 희망이 가득하고 자유가 펼쳐진 세상. 인간이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인형이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인형사가 팔을 내리자 자신의 딱딱한 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 소리에 맞춰 고개를 든다. 인형사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우리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몸을 바로 세운다.
되돌아가는 인형사의 발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발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다른 인형사가 이리로 오고 있는 소리였다. 그 인형사 역시 발이 땅에 맞부딪힐 때의 소리를 울리며 다가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새로운 인형사가 삐걱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며 우리들 앞에 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금전 그 인형사와 똑같은 모습이다.
‘우상’이라 불리는 그 인형사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생김새가 비슷하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동작, 말투, 존재하는 이유까지도 거의 같다. 인형사는 앞서간 인형사와 똑같이 차렷 자세로 서서 한쪽 팔을 치켜든다. 우리는 다시 무릎을 꿇고 우상을 향해 머리를 숙인다. 우리는 명령이 없어도 무릎을 꿇었고, 밟히지 않아도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모두들 실에 묶인 인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동물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로 세계는 급격하게 모습을 변화했다. 동물에게 살기 좋은 자연환경은 전부 파괴되고 차갑고 딱딱한 조형물들만이 이 세계를 가득히 메웠다. 우리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시설 안에서 보호받게 되었고, 동물의 공격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그런 건 전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세계가 변하고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우리들은 변하지 않았다. 고개를 땅에 처박았을 때 흙과 풀 냄새 대신 차가운 쇠 냄새가 난다는 것 외에 지금 우리에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상 중에 하나가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낸다. 재료를 모으러 갈 시간이라는 신호다.
우리의 하루 일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우상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모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숭배하는 우상은 흙과 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재료를 모아오면 그 재료들은 이곳 영장원 어딘가에 있는 신에게로 전달된다. 그리고 얼마 후면 그 재료들은 병사의 몸을 한 채로 새롭게 태어난다. 신의 손에 의해 흙과 물로 만들어진 병사. 절대 죽지 않고, 절대 쓰러지지 않고, 그 어떤 동물과 맞서도 절대 지지 않는 무적의 병사.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다.
이곳의 모든 것은 신이 결정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도 실질적으론 그 신을 위해서다. 우상을 향해 머리를 박고 숭배하는 행위가 곧 그것을 만든 신을 향한 경외심과 신앙이니 말이다.
신앙은 한데 모아놓는 것이 효율이 좋으니 인간들은 전부 이 안에 갇혀 있다. 안전과 보안이라는 이유로 벽을 두껍게 하고 병사들이 감시하여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곳의 갇힌 인간들은 그저 신을 위한 양분으로 쓰이는 자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소환한 신은 뭐든지 만들었다. 동물과 싸워 이길 병기, 절대 쓰러지지 않는 병사, 적의 침략을 막아줄 요새.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진 않았다. 신은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 조리 기구를 만들지 않으며,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악기도 만들지 않는다. 나의 꿈을 이루게 해줄 인형들 역시 만들지 않는다.
신이 이곳에서 금지시한 건 오직 한 가지뿐이다. 바로 우상 외에 다른 것의 가치를 높이는 것. 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선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상은 언제나 절대적이어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높은 가치를 지닌 존재여야 한다. 이곳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보다 우상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야 한다. 신이 인간을 위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그림을 그려선 안 되고, 놀이를 즐겨선 안 되고, 인형을 다뤄선 안 된다. 그런 의미 있는 행동들을 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없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행위 따윈 존재할 수 없었다. 이곳의 절대적인 가치는 우상이며, 나를 비롯한 이 세계는 전부 우상만을 위해 존재한다.
영장원의 안은 차가운 강철 덩어리밖에 없지만 그 밖은 제법 다양한 자원이 있다.
우리는 우상의 지시에 따라 이렇게 밖으로 나와 그들을 위한 재료를 모은다. 재료를 모으는 것이라 해봐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저 바닥에 널리고 널린 진흙이나 모래들을 모아 한곳에 모으기만 하면 된다. 애초에 우상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가 흙과 물 외에는 없으니까.
우리는 몸을 숙이고 바닥에 깔린 흙을 주워 준비해온 수레에 담는다. 이렇게 흙을 모으는 것도 저 지치지 않는 병사들이 하면 순식간일 텐데. 굳이 이렇게 인간들에게 시켜 인간들을 직접 우상을 만드는 데 참여시킨다. 계속해서 우상을 바라게 하고, 우상을 원하는 간절함을 키워 신앙을 더욱 끌어 올리는 게 저들의 목적이다. 아예 작정하고 뼛속까지 노예로 만들 생각인 거다.
흙을 주워 담는 인간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동물과의 싸움에서 함께 하던 얼굴. 동물들에게 지배당할 때 함께 반기를 들었던 동료들 중에 하나였다. 녀석도 겉보기엔 약해 보여도 제법 싸움에 실력이 있어 도움이 되던 녀석이다. 녀석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동물을 전부 몰아내고 나면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그 광경을 손에 담는 것이 녀석의 꿈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 어떤 동물과 싸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그랬다.
우리 둘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맹세했다. 언젠가 너는 그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나는 이 손으로 인형을 다루겠다고. 지금 그 손이 이렇게 진흙이나 주우며 더럽혀지고 있는데 왜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걸까.
나와 그 녀석뿐만이 아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한때는 저마다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걸 위해 힘을 합쳐 동물의 지배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동물이 전부 사라진 지금 우리들 중에 꿈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왜 함께했었나? 우리는 왜 싸웠지? 이렇게 하나같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우상을 위한 노예로 사는 게 우리의 꿈이었나? 그런 게 아니었을 거다.
시간이 한참을 흘러 인간들이 모은 흙이 수레를 한가득 채웠다. 작업의 종료를 알리는 병사의 지시가 울려 퍼진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인간들이 작업을 멈추고 한곳으로 모였다. 병사들이 신호를 주자 영장원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병사들은 우리가 모은 흙이 담긴 수레를 끌며 그 안으로 들어가고, 인간들도 그 뒤를 따라 차례차례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캄캄한 어둠 속으로 돌아온 인간들은 저마다 적당한 공간을 찾아 앉는다. 우리가 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 그리고 우상을 위한 재료를 모아오는 것. 그 외엔 없다. 안으로 돌아온 인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곳에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없다. 그나마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그저 벽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영장원 안으로 들어온 후,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은 당연히 그 녀석이다. 그 녀석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벽이나 보며 말없이 앉아있다. 이전처럼 동물에게 맞서 싸우던 활기찬 모습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등을 굽히고 몸을 쭈그리고 앉아 생기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눈동자를 꿈뻑거리고만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내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그는 그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때 했던 맹세를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고.
그림을 그리는 상상을 할 때의 녀석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푸른 새싹을 향해 손을 내밀던 녀석의 눈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모두가 동물들의 세계를 저주할 때, 녀석은 먹고 먹히기만 하는 그 세계를 아름답게 바라봤다. 그곳에 펼쳐진 자연을 그림으로 그려 손에 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연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이곳에 갇힌 지금, 너는 왜 아무런 분노도 하지 않는 거냐. 우상들이 나무를 자르고 숲을 파괴할 때 너는 뭘 했지? 꿈을 이야기할 때 반짝이던 그 눈빛은 어디 갔지?
내 질문에, 그는 무척이나 평안한 얼굴로 미소 짓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답했다.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이 평안한 표정으로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는 녀석들이 전에도 있었으니까.
‘낙원을 찾았다’고? 멀쩡한 인간도 인형으로 만드는 그 집 말인가? 떠올리기 싫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그 녀석들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이곳에선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야 지금 내 눈앞의 이 녀석도 그때와 같이 평안한 얼굴이니까.
예전의 내 동료들도 녀석과 같은 표정이었다. 동물에게 맞서 싸우던 시절이 아닌 그보다 더 이전. 내가 살아있었을 때 함께 했던 동료들. 그 녀석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스쳐 지나가는 옛 기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은 내 미소를 보고 당황하더니 몸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난다. 당황하는 녀석을 향해 다가가며 나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내 별명을 아느냐고. 정확히는, 내가 살아있을 적 불렸던 별명이 뭔지 아느냐고. 녀석은 나를 막아 세우며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녀석 따위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린 언제나 동물과 싸우는 방법이나 서로의 꿈에 대해서나 이야기 했지, 이런 사소한 대화는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옛 기억에 취해 한껏 웃으며 그 평안한 표정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봉래인형’
그것이 옛 동료들이 나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는 그렇게 싫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듣기만 해도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병사 하나가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린다. 그 병사는 딱딱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오더니 우리 둘의 대화를 멈추게 하고 강제로 갈라놓았다. 나와 그 녀석의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곳에서 대화는 오래 허용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인간들 사이에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을 저들은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협력이나 의존. 다른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곳의 절대적 가치는 우상이다.
나에게도 한때는 서로 협력하고 의존하는 동료라는 녀석들이 있었다. 함께 연극 활동을 하던 생전의 동료들. 나를 봉래인형이라 부르는 동료들.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이 끝까지 나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단순히 외형과 많이 닮았다는 것. 실제로 생전에 내가 가지고 놀던 인형 중에 봉래인형이라는 이름의 인형은 나와 모습이 많이 닮아있었다. 원래 이것저것 인형을 모으다 보니 어쩌다 얻게 된 것이었지만 기다란 속눈썹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블론드 머릿결은 내가 그 인형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그 녀석들은 내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봉래인형이라는 것은 평생 변하지 않는 모습의 인형이니까. 겉모습이 작고 어린 나를 보며 장난치듯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단순히 나이에 비해 외모가 어려 보였을 뿐이지만 녀석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길 좋아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정직자’라 불리는 8명으로 이루어진 도적단이었다.
우린 언제나 공연을 했다. 저마다 다른 피에로 분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각자의 재주를 선보였다. 칼을 휘두르고 아이들을 사로잡고 돈과 보석을 약탈하는 것은 우리의 특기이자 공연의 자랑거리였다. 공연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그 떠들썩한 거리를 마음껏 활개 치며 피에로 분장을 한껏 웃게 만들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를 발판으로 삼아 공연을 선보였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놀라서 뒤로 쓰러지는 노인의 모습은 배꼽이 빠질 정도로 우스꽝스러웠다. 물건을 훔치고 달아나는 우리들을 쫓아오던 청년은 우리의 함정에 걸려 발목이 잘려 나갔다. 친절하게 다른 한쪽 발목도 잘라주러 갔을 때의 그 청년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화약이 터지고 불길에 휩싸이는 거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전신이 불길에 휩싸여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행진은 그날 연극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 가진 돈을 전부 내놓으며 살려달라고 비는 부모의 모습은 무척이나 애절했다. 그 아이가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도, 절규하는 부모의 모습은 그곳 사람들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웃고, 울고, 분노하고, 공포에 질리고. 공연은 사람들의 감정을 다양하게 이끌어냈다. 인형들은 우리의 각본대로 무대 위에서 춤췄고, 우리는 그런 인형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아니, 즐거워하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공연에 몰두했다. 계획을 짜고, 소품을 준비하고, 어떻게 해야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편의 인형극이 될지를 고민했다. 연극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관객들을 향해 폭죽을 터트리며 인사했고, 극적으로 도주에 성공할 때면 그 긴장감과 흥분에 몸서리치며 한껏 기쁨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이번 공연의 연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녀석들은 이번에 벌어들인 돈의 액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관객들의 다양한 표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녀석들은 그 돈으로 얼마나 안락한 삶을 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녀석들은 연극에 즐거워하지 않았다. 춤추는 인형들의 모습을 보며 감동받지 않았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건 그저 돈. 식량. 평안. 안식. 낙원...
아아, 그래. 생각났다. 녀석들이 나를 봉래인형이라 부르는 가장 큰 이유. 그랬었지. 녀석들은 나를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평소엔 거의 무표정에 반응도 없이 지내다가 도적질이나 인형극을 할 때면 누구보다 활짝 웃는 내가 마치 조종당하는 인형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작 인형 같은 것들은 자기들인 주제에.
녀석들은 그곳에 들어간 이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제공되는 식사와 밤에 몸을 눕힐 잠자리만 있으면 그곳을 낙원이라 부르는 녀석들. 전신을 짜릿하게 하는 도적단의 생활을 모두 잊고 편안함에 취해 드러누워 있는 녀석들의 모습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인형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고 인간 흉내를 내는 인형에 불과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 몸짓이 마음에 안 들었다. 즐겁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웃는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녀석들의 목을 자르고 머리에 못을 박은 건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쓸모가 없어진 인형은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적어도 마지막 인형극만큼은 화려하게 장식해 줬으니 녀석들도 나에게 고마워했을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도 말없이 벽이나 보며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똑같이 물었다.
왜 싸우지 않는가?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곳은 안전하니까. 동물에게 당할 필요가 없으니까. 병사들이 우릴 지켜주니까. 그렇게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편안함에 취한 자의 얼굴. 그들도 똑같은 얼굴이다. 이곳에 내 동료들은 없지만 내 동료들만큼이나 역겨운 녀석들은 많았다. 8명만 모여있어도 역겨운 정직자가 이곳엔 바퀴벌레만큼이나 바글거렸다.
이곳의 병사들은 외부의 벽을 더 높이 쌓고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 누구도 내부의 가치 있는 일은 만드는 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엔 공연이 없고, 춤이 없으며, 삶을 아름답게 꾸밀 그 무엇도 없다. 그런데도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아무도 맞서 싸우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안전이 보장되기만 하는 곳에서 매일매일 의미 없는 하루를 반복하며 거짓 웃음을 짓는다. 그곳에 들어가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썩어 빠진 내 동료들처럼.
멀리서 우상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여느 때처럼 우상은 인간들 앞에 몸을 빳빳이 세우고 한쪽 팔을 치켜든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인간들은 빛에 몰려드는 벌레 떼처럼 한곳으로 우르르 몰려와 그 우상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인간들이 우상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인간들의 행렬의 맨 앞에 있는 한 늙은이는 버러지 같은 얼굴을 하고 어눌한 말투로 우상을 숭배하는 말을 읊기 시작한다. 이어서 그 옆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할 말조차 스스로 생각해내지 못하는지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읊는다. 다른 사람들은 양손을 모으고 쓰레기 위에 앉은 똥파리 마냥 손을 비벼대며 우상에게 기도를 올린다.
우상을 향해 냄새나는 주둥이를 놀리며 입이 닳도록 찬양의 말을 내뱉던 늙은이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있는 힘껏 자신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그가 머리를 박자 뒤에 늘어선 다른 사람들도 그 가벼운 대가리를 차례차례 땅에 내리박는다. 늙은이는 어딘가 모자란 장애인 마냥 자신의 머리를 계속해서 땅에 처박으며 우상을 숭배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따라 몇 차례씩 머리를 땅에 쥐어박으며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머리를 처박던 늙은이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양팔을 크게 벌리고 외친다.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 전지전능한 존재. 세계의 구원자. 우상을 향해 갖가지 수식어를 붙이며 이곳을 낙원이라 부르짖는 그의 모습은 개, 돼지들이 바닥에 싸질러놓은 배설물의 냄새보다도 역했다. 그의 모습을 따라 하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짐승보다 가축 같았고 진흙 덩어리 병사들보다 인형 같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서 있었다. 나는 무릎 꿇지 않았고, 머리를 땅에 박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는 나다. 저딴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밖에 못하는 한낱 진흙 덩어리 따위가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들은 나를 붙잡아 무리 밖으로 끌어낸다. 나는 그들에게 저항했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 없었다. 동물들보다 월등히 강한 병사들의 힘을 나 혼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를 무리 밖으로 끌어낸 그들은 내 팔을 잡고 다리를 붙들었다. 그리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길고 날카로운 칼을 뽑아 내 배에 찔러 넣었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순식간에 밀려 들어오는 고통에 비명 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병사가 다른 칼을 뽑아 든다. 똑같이 그 끔찍한 흉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찔러 넣는다.
피를 토하고 비명을 지른다. 붙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는 팔다리를 떨며 비명 지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은 내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며 계속해서 배를 찔러댔다. 피가 넘치고 터져 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셨지만 이미 죽은 몸은 더 죽을 수도 없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명은 몸 안을 맴돌며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전신의 통증에 온몸이 뒤틀리고 눈알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입이 틀어막힌 채로도 인간을 위한 세계를 외쳤다. 누군가는 나를 따라와 주리라 믿으며, 다시 한번 동물에게 맞서 싸우던 그때처럼 되기를 바라며, 틀어막힌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명 질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핏방울 사이로 보인 인간들은 이전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우상을 향해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생을 안전하게 지켜줄 우상. 자유를 외치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전신에 칼날이 쑤셔지는 고통 속에서 눈에 비치는 것은 언제나 보던 그 광경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마냥 바글바글한 인간들이 하나같이 토악질 나오는 행동만을 반복하는 언제나의 그 모습뿐이다. 아니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건 뭐냐? 저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지? 저들이 호기심이란 걸 품을 수 있나? 저들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나? 저들에게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있나? 꿈을 향해 나아갈 의지가 있나? 아니! 저들은 인형이다! 낙원이라는 상자에 안에 갇혀 영원히 변하지 못하는 봉래인형!
...
얼마나 오랫동안 피를 흘렸을까. 우상들이 칼질이 멈추고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일어날 기력도 없다.
주변이 고요하다. 우상을 숭배하는 소리밖에 없는 이곳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영혼으로 가득한 이 강철 상자 안에 영혼다운 모습이라곤 새의 발을 쥐어짰을 때 흐르는 피 한 방울 만큼도 없다.
미동조차 하기 힘든 몸을 돌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의 눈동자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인간들이 전부 사라졌다. 이곳엔 인간들의 영혼이 하나도 없다. 한때 인간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몸이 태엽에 감겨있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땅에 머리를 처박는 인형들만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아아, 인형이다. 내가 바라던 인형들이 이렇게나 많다. 나의 꿈을 이뤄줄 인형들이 눈앞에 가득하다. 인형은 다뤄주어야 한다. 인형은 조종해야 한다. 이딴 지루하고 반복적인 동작이 아닌 전신을 짜릿하게 하는 나의 인형극을 보여주어야 한다. 실이 필요했다. 의미 없는 인형들의 움직임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어 줄 실이...
밖으로 나온 인형들은 오늘도 벌레처럼 땅을 기며 우상에게 바칠 흙을 모으고 다닌다.
벌레 흉내를 내는 인형이라니, 나름 흥미롭다. 하지만 별로 재밌진 않다. 어떤 수준 낮은 인형사의 놀이인진 몰라도 땅을 기며 흙을 줍기만 하는 인형들이 전부인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연이었다. 나 역시도 그 인형들 무리 속에 섞여 있다. 죽은 몸은 쉴 필요가 없다. 병사들에게 그렇게나 난도질당한 몸이지만 어차피 영혼밖에 남지 않은 몸은 금방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와 병사들을 위한 흙을 모으는 데 쓰인다.
육체가 없다곤 하지만 통증은 그대로 느껴진다. 아직도 그때의 통증이 기억에 남아 움직이는 게 쉽진 않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나에게 무엇보다 힘든 건 통증 따위가 아닌,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수준 낮은 이 공연을 계속 관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건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는 것보다 싫었다. 나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그 지루한 공연의 현장을 벗어났다.
흙을 줍기 위해 찾아다니는 척 도망쳐 나온 나는 어느새 현장으로부터 꽤나 멀어졌다.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이 주변을 몇 번만 돌아본다면 금방 들킬 위치였다. 다시 병사들에게 붙잡히는 것만은 질색인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좁은 바위틈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때였다. 그 바위틈 사이에 있던 무언가의 낯선 감촉이 내 피부를 스쳤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아닌 부드러운 털. 그것은 늘 피부에 닿던 조형물의 감촉이랑은 달랐다. 나는 내 피부에 닿은 감촉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 아닌 영혼이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온몸을 가득히 뒤덮은 털. 틀림없었다.
동물. 그것도 한 마리뿐이다. 동물이 혼자서 이런 곳까지 숨어들어 오다니, 동물이 우상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녀석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동물은 이제서야 나와 몸이 닿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동물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 온몸의 털을 빳빳이 세우고 뒷걸음질을 친다. 아마 나보다 더 놀란 듯하다. 동물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짐승의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나는 잠시 주춤했지만 녀석은 나를 잔뜩 노려보기만 할 뿐, 섣불리 공격하진 않는다. 내가 여기서 소리라도 질렀다간 순식간에 몰려든 병사들에 의해 녀석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동물이 여기에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별로 생각할 것도 없다. 뻔하지 않은가. 동물들은 아직도 세계의 지배를 포기하지 못했으니까. 보나 마나 어느 조직의 명령대로 어디 병사들의 빈틈이나 약점을 조사해보러 숨어든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 동물은 어느 조직의 동물이었더라. 경아조? 귀걸조? 강욕동맹? 뭐, 어디든 상관없다. 이렇게 좋은 기회에 조직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진정하라는 손의 제스처를 취했다. 동물은 얼굴에 물음표라도 적힌 듯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쳐다본다. 그야 그렇겠지. 인간이 동물을 만났는데 도망치지 않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으니까.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녀석은 다시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아무리 뒷걸음질을 쳐봐야 딱히 더 물러날 곳도 없다. 이 좁은 바위 뒤에 간신히 숨어 있는 녀석이 더 몸을 뺐다간 삐져나간 털이 병사들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나는 동물에게 손을 내밀며 이름이나 조직, 이곳에 온 이유 등에 대해 물었다.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나를 경계하며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 같은 동물과 친해지는 건 반나절이 걸려도 부족할 게 뻔했다. 덕분에 동물과 친해지는 것을 포기하는 데에는 미련이 없었다. 대신 나는 그 동물과 동맹을 맺고 싶다고 말하며 내가 계획한 연극의 시나리오를 소개했다.
계획이라 할 것도 없는 사소한 인형 놀이다. 육체가 없는 동물들은 영혼이 없는 병사들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니 육체를 가진 강한 인간을 속여 동물 대신 병사와 싸우게 한다. 인간이 병사들을 쓰러뜨리면 후에 몰려온 동물들이 한 번에 달려들어 우상을 만든 신을 쓰러뜨린다. 신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하면 세계는 다시 동물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을 거다. 계획의 전체적인 지휘는 귀걸조에 맡기도록 했다. 귀걸조의 조장은 사람을 속이는 데 능숙했으니 그녀라면 내 계획을 실수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거다.
내 계획을 들은 동물은 한동안 벙쪄 있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걸걸한 짐승의 목소리가 병사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낮춰 나에게 이러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 자신들과 적대 관계에 있던 인간이 오히려 동물을 돕고 있으니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궁금해할 만도 하다.
글쎄. 당장 이유를 답하자니 너무나도 많다. 아마 내가 인형극을 좋아해서? 수많은 인형들을 눈앞에 두고 다룰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보잘것없는 인형들이나 가둬놓는 상자 주제에 겉만 번지르르한 이 세계가 꼴 보기 싫어서? 하나만 고르라니 정하기 힘들다. 이유를 말하는 대신 나는 동물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나를 그 동물의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줄 것. 동물들이 다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돕는 대신 나 역시 인간을 지배하는 동물 측에 서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동물이 잠시 고민한다. 녀석은 갈수록 황당한 말만 늘어놓는다며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제안을 수락했다.
수락한다곤 했지만 동물들이 정말 나를 받아줄지는 모른다. 그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로 내가 그들에겐 협력할 거란 확실한 보장은 없다.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과 동물의 말을 그저 믿을 뿐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서로 잃을 것도 없는 처지다.
내가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곤란해진다. 나를 찾으러 다니는 병사들에 의해 이 동물이 들키기라도 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나는 그 동물과 한 번 더 계획을 확인하고, 작업이 끝나고 나면 병사들의 시선이 영장원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들에게 쏠릴 테니 그 틈을 타서 도망가라는 말만을 남기고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돌아온 장소는 아무런 변함도 없었다. 지루한 공연은 흙을 줍는 인형들과 그를 감시하는 병사들의 평소 모습 그대로다. 아무도 이 근처에 동물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조용히 끼어들어 여느 때처럼 허리를 숙여 바닥의 흙을 주워 담았다. 한 손 가득히 흙을 움켜잡았을 때, 손가락에 실이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귀가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영장원 내부가 혼란스럽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긴급상황이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인간들을 더욱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다. 동물과의 약속이 있은 후로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 난데없는 적의 습격에 당황한 병사들은 서둘러 인간들을 대피시키기에 바쁘다. 인간들 역시 이례 없는 적의 침략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피한다. 드디어 작전의 시작인 것이다.
이곳에서 밖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병사들의 다급한 상황을 보아하니 동물이 속여온 인간이 제법 착실하게 움직여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전에 어떤 동물과 싸워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병사들이 지금은 적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말만 듣고도 상당히 다급하다. 혼란 속에서 겁에 질린 인간들이 할 일은 영장원의 더욱 깊숙한 내부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들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그리고 더욱 안전한 곳으로 달린다. 나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영장원의 내부가 아닌, 바깥과 가장 가까운 문을 향해 달렸다.
나는 달리면서 나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입혔다. 스스로 몸을 물어뜯고, 벽에 들이받고, 날카로운 쇠붙이라도 눈에 보인다면 닥치는 대로 몸을 베어 전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나의 몸은 피에 젖어 너덜너덜해졌고 나는 계속해서 나의 몸에 상처를 늘려갔다.
문의 바로 앞까지 다다르자 그곳에는 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한가득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병사들은 나에게 칼을 겨누며 당장 내부로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나는 경계하는 그들에게 저항의 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하며 손에 쥐고 있던 동물의 털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처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동물들이 영장원 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왔다. 인간들을 습격하며 그들을 공격하고 납치해가는 중이다. 한시라도 빨리 병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영장원 내부에 동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 털은 전에 동물과 계획을 짤 때 미리 녀석에게서 받아둔 것이다.
병사들은 상처투성이인 내 몸과 동물의 털을 보고 내 말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동물의 침범을 허용했다는 생각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상처 입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병사들이 서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영장원의 내부를 향해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발소리는 알기 쉽다. 그 딱딱한 발소리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걸어도 숨길 수 없다.
병사들이 전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는 바닥에 몸을 엎드린 채 있었다. 마지막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강철로 뒤덮인 벽밖에 보이지 않는다. 병사들은 전부 물러가고 이곳엔 나 이외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영장원의 유일한 출입구인 이곳엔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눈앞엔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문이 있다. 인간들을 관리하기 위한 이 요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두껍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입구인 문은 굳게 닫혀있다. 굳이 병사들이 이곳을 지키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지난 몇 년간 병사들은 이 시설을 보다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인간을 위한 어떤 물건도 만들지 않고 모든 재료를 쏟아부어 만든 덕분에 이곳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외부의 어떤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이 문이 내부에선 단지 버튼 하나만으로 손쉽게 열린다. 내부에서 누군가 버튼을 눌러주기만 한다면 이 문은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거대한 통로가 된다. 바로 그 버튼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숨을 쉬는 것 이상으로 살아있는 이 느낌. 전신을 짜릿하게 하는 전율에 온몸을 맡긴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시자 죽은 몸에서 생기가 돋고 영혼의 심장이 고동치는 게 느껴진다.
나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모아 얼굴에 묻혔다. 눈에도, 코에도, 입에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피에 물든 입술도 함께 웃는다. 얼굴이 비치는 강철 벽에는 여느 공연 때처럼 피에로 분장을 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분장을 마치자 때마침 밖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인간을 데려온 동물이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바로 문 앞까지 와 있다는 신호였다. 동물의 큐사인에 맞춰, 나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버튼을 눌렀다.
자, 실로 오랜만의 인형극이다.
극의 제목은 ‘지옥의 인형’.
지옥이라는 화려한 무대를 두고 춤추지 못하는 가엾은 인형들. 그 인형들을 춤추게 해줄 시간이다. 내가 손을 움직이면 나의 의지는 실을 타고 흘러가 인형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줄 것이고, 그 인형들의 움직임은 이 의미 없는 세계를 찬란하게 빛낼 것이다.
종말을 맞이한 우상의 세계.
서로가 물어뜯고 죽이며 피가 튀는 살육.
귀형들이 춤추는 비극이자 인형들이 비명 지르는 희극.
영장원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무대의 막이 오른다.
인간은 인형. 동물은 그에 매달린 실.
나는 인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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